미리보는 오늘 일정

비행기에서 인터넷도 하고 영화도 보고 뜨문뜨문 잠도 잤는데, 토론토에 도착하고 보니 생각보다 시차 적응이 어려웠다.
공항에서 별 고민 없이 우버를 타고 호텔로 향하는 길, 로저스 센터가 보이길래 잠시 ‘누헨진의 첸쟙’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겼다가도 몸이 영 개운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돌아왔다.

예약한 곳은 Yonge Street에 있는 호텔 빅토리아였다.
토론토에서도 아주 한복판에 있어서 걸어 다니기 좋겠다는 생각에 고른 곳이었다.
토론토의 주요 거리 중 하나가 중국식 이름처럼 보여 호기심이 일던 찰나 호텔에 도착했다.
제법 고풍스러운 외관과 달리 로비는 어딘지 모르게 어수선했다.



아직 체크인하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짐만 맡겨두고 식사나 하러 나갈 생각으로 직원에게 말을 걸었더니, 이 사람이 명함을 건네며 제법 솔깃한 제안을 했다.
구글에 자기 이름을 넣어 좋은 리뷰를 남겨주면 지금 방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겠단다.
직원에게는 칭찬 리뷰가 생기고 우리에게는 얼리 체크인이 생기는, 실로 명쾌한 윈윈이었다.
그 자리에서 은밀하게 리뷰를 작성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비행기를 타고 온 몸을 따뜻한 물로 씻고 나갈 수 있다니, 짐만 맡기려던 참에 이런 호사라면 얼마든지.
팀 홀튼, 하키선수였어?!
씻고 나와 하키 명예의 전당에 잠시 들렀다가 팀홀튼을 보고 커피나 한 잔 사기로 했다.
오, 팀홀튼이네.
한국에서도 보던 간판이라 별생각 없이 들어갔는데, 벽에 하키 장비를 착용한 사람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팀 호튼이었다.
이 사람이 하키 선수였나봐!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그 선수가 자기 이름을 붙여 시작한 커피 가게가 팀홀튼이었다.
하키 선수가 차린 카페가 몇십 년 뒤에는 한국에서도 익숙하게 마주치는 카페가 되다니.
정말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인데, 나는 왜 이렇게 다 아는 체하며 지내는 걸까. 커피 한 잔 사러 들어왔다가 또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블랙커피와 라테를 하나씩 손에 들고 세인트로렌스 마켓으로 향했다.
날은 좋은데..



마켓은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뉴질랜드 퀸스타운에서도 이런 시장을 봤던 것 같고, 엄청난 기대를 하고 들어간 건 아니었지만 서양에 왔으니 샌드위치도 먹고 싶고 베이글도 먹고 싶었다.
서로 다른 가게에서 샌드위치를 하나씩 사서 바깥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는데, 날도 좋고 이제 좀 먹어볼까 하는 참에 비둘기와 벌이 자꾸 우리 주변을 얼쩡거렸다.




아내가 싫어하는 두 존재다.
아내는 시골 출신이지만 원령공주 같은 타입은 아니고, 나는 도시 출신이지만 대충 원령공주 같은 타입이라 평소 같았으면 날도 좋은데 그냥 먹자고 했을 법하다.
그런데 자꾸 가까이 오니 나도 짜증이 났다. 우리는 마켓 안의 스탠드 테이블로 옮겨 식사를 마쳤다.
밥을 먹으며 다음에는 뭘 할지 생각하다가, 큰 도시에 왔으니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가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데 아내와 의견이 모였다.
지도를 보니 온타리오 미술관, AGO가 있었다.
무슨 전시를 하는지 알고 온 것도 아니고 그 전시를 보겠다고 이날을 비워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미술관이 있길래 가보기로 하고 도시를 가로질러 걸었다.




그런데 토론토 시내가 생각보다 무서웠다.
오기 전에 대충 찾아본 바로는 밴쿠버의 특정 지역에 홈리스와 약물 문제가 있다는 정도를 알고 있었는데, 토론토에 도착한 첫날부터 뉴스에서 보던 북미의 거리 풍경이 떠올랐다.
몸을 숙인 채 서 있거나 비틀거리는 사람들, 거리에서 무리 지어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사정으로 거기 있는지 우리가 알 수는 없었고, 우리에게 공격적인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런 풍경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는 바짝 쫄았다.
평소 같았으면 아내가 훨씬 더 겁을 먹었을 텐데 이번에는 나도 어찌나 쫄았는지, 주변만 두리번거리며 걷다가 정작 발밑에 버려진 테이크아웃 커피컵을 못 보고 차버렸다.
그리고 내가 차놓고 내가 화들짝 놀랐다.
돌아온 지금까지도 아내가 그걸로 놀린다.

유행하는 컨텐츠, 그 불가해함에 대하여
마켓에서 미술관으로 걸어가다가 이튼 센터에 있는 인디고(서점)에 들렀다.


여행 와서 책 못 사면 죽는 병 같은 것에 걸려서인지,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가듯 서점에 들어갔는데, <나 혼자만 레벨업>을 위시한 아시아권 웹소설과 웹툰 출판본들이 메인 서가를 점령하고 있는 모습에 제법 격세지감을 느꼈다.


K-pop, K-culture라는 단어를 정작 이 단어의 소비자인 외국인들보다 한국 정부와 매스컴이 더 열심히 밀어붙이던 것처럼 느껴졌던 2010년대 초반에 20대를 보낸 나로서는, 이 K-접두사가 자생하는 키워드가 된 지금의 상황을 정말로 놀랍게 받아들였달까.
실제로 토론토 다운타운을 걸으면서도 예전 같으면 상상하기 어려웠을 풍경을 종종 보았다.
어릴 적 해외에서 보이던 한식당은 마치 북한 식당들처럼, 청사초롱에 태극기가 덕지덕지 붙은 KOREAN RESTAURANT라는 간판 아래 온갖 정형화된 한식을 팔던 곳들로 기억하는데, 이제는 네네치킨 같은 체인은 물론이고 K-감성주점마저 있다니.



문화는 결국 기업이나 정부 같은 공급자가 밀어붙인다고 붐을 일으킬 수 있는 무언가는 아니고, 소비자가 움직여야 비로소 시장이 열리는 것임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각설하고, 인디고 중앙 서가의 수많은 아시아 웹소설 출판물들을 보며 서양에서 먹히는 아시아의 새로운 컨텐츠는 대략 이런 쪽인가, 하고 훑어볼 수 있었는데, 주로 BL에 시대극과 무협을 더한 느낌의 컨텐츠들이 흥하는 듯했다.


<나 혼자만 레벨업>의 경우에는 일본 망가 수준의 위상으로(거진 원나블 급의 위상 같았달까), 별개의 카테고리로 팔리는 느낌이었고.
한국에서도 무협을 넘어 중국발 수선물들이 유행하는 시점에, 서양에서는 이에 더해 무협 BL이라니, 문화상품이란 참으로 불가해한 것이구나 하였다.



21세기 문화상품에 대한 오묘한 감정을 품고, 19~20세기의 근현대미술을 보러 발걸음을 옮겨본다.
모바일 혁명 이후 세대 사이클이 너무 빨라진 것 같기는 하지만, 18세기의 사람들도 만약 19세기나 20세기의 예술을 볼 수 있었다면 비슷한 감정을 느꼈으려나?
뭔가 <미드나잇 인 파리>가 짚었던 노스탤지어의 허상과도 비스무리한 감정을 품고.
북미 대도시, 미술관은 가줘야지

큰 도시에 왔으니 미술관이나 한번 가보자는 정도였는데, 마침 AGO에서는 댈러스 미술관 소장품으로 꾸린 <The Impressionist Revolution: Monet to Matisse>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모네에서 마티스까지, 인상주의와 그 이후의 그림들을 볼 수 있는 전시였다.
무슨 전시를 하는지도 모르고 찾아와서 모네의 수련을 보게 됐으니 뜻밖의 행운이었다.


나는 20년쯤 전 부모님과 유럽이나 러시아를 여행하면서 교과서에 나오는 유명한 그림들을 본 적이 있었는데, 아내는 이런 화가들의 원작을 보는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함께 보고 있다는 게 뭔가 더 뿌듯했다.



예전 같았으면 나는 이런 거 많이 봤지, 하는 마음으로 그림 옆의 작품명과 작가 이름부터 뚫어져라 들여다봤을 것 같다.
음, 이 사람 거군, 하면서 정작 그림은 얼마나 봤을지.
이번에는 최대한 작품부터 보고 마음에 들면 그제야 누구 그림인지 확인했는데, 그 느낌이 참 좋았다.
쿠사마 야요이의 설치 작품 <INFINITY MIRRORED ROOM – LET’S SURVIVE FOREVER>도 보고 사진도 찍으며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미술관 건물 자체를 구경하는 것도 좋았다. AGO는 유명한 뷰 맛집이다.



사르트르의 ‘자기기만’을 빌려 생각해보면,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설명에 너무 충실하려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여행을 많이 다닌 사람, 유명한 그림 정도에는 호들갑 떨지 않는 사람.
그런 설명들이 나를 얼마나 정확히 표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종종 그 설명에 어울리는 반응을 먼저 고르고 있었던 게 아닐까.
랄프 왈도 에머슨은 ‘어리석은 일관성’을 작은 마음들을 괴롭히는 도깨비에 빗댔다.
예전에 한 말과 남들이 기억하는 자기 모습 때문에 지금의 판단까지 붙들어놓는 태도를 비판하는 대목이다.
나는 원래 그런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나는 이미 많이 봤으니까.
취향이라고 생각하며 지켜온 것들 가운데는 그저 예전에 그랬다는 이유로 계속 그래야 한다고 여긴 것도 있었을 것이다.
좋은 걸 보면 좋다고 하면 될 일을, 그걸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도 괜찮은지부터 심사하고 있었으니 조금 피곤하게 살기는 했다.
그렇다고 이번에는 반드시 편견 없이 보고, 반드시 솔직하게 감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마음먹으면 또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것 같다.
모네를 보고 좋아하는 와중에도 지금 충분히 순수하게 좋아하고 있는가를 점검한다면, 그림 앞에서 할 일이 너무 많지 않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내 머릿속, 너무 피곤하다. '알을 깨는 것'도 좋지만, 또 그 목적성에 잡아먹혀버리지 않게 조심해야지 다짐했다.





내일은 나이아가라
미술관을 보고 나니 시간은 어느새 저녁이 되었고, 피곤하기도 하고 밤의 거리를 더 돌아다닐 자신도 별로 없어서 편의점 같은 곳에서 간단히 먹을 것을 사 호텔로 돌아갔다.


평소 같았으면 술도 조금 마셨을 텐데 다음 날은 아침 일찍 나이아가라 투어 픽업이 있었다.
햇살 쨍한 날에, 별로 거슬리지 않는 투어그룹에 낑겨서 폭포를 잘 볼 수 있을까.
어이없게도 둘 다 씻지도 못하고 바로 뻗어버렸다.
